세계 3대 진미라 꼽히는 식재료가 있죠. 트러플, 캐비어, 푸아그라. 그 중 트러플과 캐비어가 가장 많이 팔리는 시기가 바로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입니다. 최고급 벨루가 캐비어는 30g에 30만원을 호가하는데, 사람들은 이런 캐비어를 먹으면서 럭셔리한 기분을 느끼길 바라거든요. 오늘은 이 고급 식재료인 트러플과 캐비어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뤄보고자 합니다. 이 두 재료는 정말 비싼 돈을 주고 사 먹을 만한 식재료일까요?
트러플 역사와 유럽인들의 인식
트러플은 버섯입니다. 다른 버섯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땅속에서 자란다는 거죠. 때문에 일반 버섯과 달리 감자처럼 동그란 모양으로 자랍니다. 향이 굉장히 강한 게 특징인데요. 번식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버섯류는 포자를 공기 중으로 퍼트려서 번식합니다. 하지만 트러플은 땅속에 있으니까 불가능하죠. 그렇기 때문에 우선 동물들이 좋아할 만한 향을 퍼트립니다. 냄새를 맡은 동물들이 트러플을 파서 먹고 숲속에다 볼일을 보면 자리에 트러플이 번식하게 되는 거죠. 모든 종족은 번식을 위해 태어났고 상황에 맞게 진화하니까요. 동물이 아닌 인간이 트러플을 먹게 된 건 꽤 오래된 일입니다. 땅속에 숨어 있고 채집으로만 캐다 보니 쉽게 보긴 힘들었지만요.
트러플에 대한 첫 기록은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까지도 트러플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어요. 소설가 알렉상드로는 트러플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학식이 깊은 사람들이 이 덩이버섯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2000년 동안의 논쟁과 토론 끝에 그들이 한 대답은 "모른다"였다. 굉장히 소설가다운 표현이면서도, 트러플이 얼마나 논쟁거리였는지 짐작이 가는 문구입니다.
땅속에서 나는 신비로운 존재, 깊고 묘한 향, 이런 특징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죠. 고대 로마가 멸망하고 게르만족이 유럽을 차지하면서 트러플은 한동안 잊혀지게 되는데요. 게르만족이 돼지를 본격적으로 기르기 시작하면서 트러플은 재발굴됩니다. 돼지들이 숲을 돌아다니면서 땅속에 있는 트러플을 파먹는 걸 보고 유럽인들도 먹기 시작한 거죠. 때문에 옛날에는 트러프를 찾기 위해서 돼지를 이용했습니다. 당시엔 돼지를 방목형으로 길렸고 돼지는 트러플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찾는 족족 다 먹어버리기 때문에 지금은 개가 이 작업을 합니다. 개는 돼지와 다르게 트러플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당시 유럽 사람들은 트러플을 어떻게 어떻게 인식했을까요? 과거 유럽인들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이렇게 구분 지었습니다. 인간이 가공한 것은 문명, 자연 상태 그대로의 산물은 야만. 지금과는 좀 반대죠. 이런 의미에서 트러플은 굉장히 모순적인 존재였습니다. 땅속에서 자라는 데다가 가공하지 않고 먹으니 야만적인 재료지만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귀족들이 포기를 못 했거든요.
프랑스의 트러플 재배와 산업성장
17세기 유럽의 식문화는 자연의 맛을 강조한 쪽으로 발전했는데요. 덕분에 트러플은 이 모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연 에서 오는 데다가 희소성까지 있으니까 귀한 재료로 주목받았고 인기는 점점 더 높아졌죠. 18세기까지 인기가 많았던 트러플은 화이트 트러플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인 피에몬테주에서 주로 나죠. 이탈리아 화이트 트러플의 이름은 투베르 마그나툼입니다. 왕의 트러플이라는 뜻인데요. 이렇게 불리게 된 이유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사르데냐 왕국에서 외교 선물로 트러플을 주고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트러플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블랙 트러플은 화이트 트러플보다 질이 낮다고 평가했고요. 하지만 블랙 트러플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 위상이 달라집니다.
프랑스의 식문화가 크게 발달한 건 나폴레옹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입니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외교관인 탈레랑은 트러플 산지로 유명한 페리고르 출신이었는데요.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당대 최고 요리사였던 마리 앙투앙 카렌을 데리고 다녔다고 해요. 외교 자리에서 음식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식사 외교, 미식 외교란 말이 있을 정도니깐요. 아무튼 훌륭한 요리 솜씨 덕분에 외교 테이블에서 호응을 얻었고, 블랙 트러플의 위상까지 높아진 겁니다. 이후 검은색 송로버섯은 트러플 드 페리고르라고 부르게 됐죠.
트러플이 귀한 대접을 받는 것 중 하나는 구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원래 재배가 불가능했으니깐요. 사실 어떻게 자랐는지도 몰랐죠. 하지만 19세기에 힌트를 얻게 됐어요. 트러플이 자라는 숲의 나무를 다른 숲으로 옮겨 심으면 그 숲에서도 트러플이 나오는 걸 발견한 거예요. 트러플이 문서에 기록된 지 3600년이 넘어서야 트러플 재배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거죠. 숲을 이용한 트러플 재배는 이렇게 프랑스에서 본격화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연한 계기로 트러플 산업이 더 풍성해질 수 있게 됐거든요. 한때 프랑스에서는 펠록세라는 진딧물이 유행하면서 수많은 포도나무가 말라 죽게 됩니다. 이때 프로방스의 보클리저라는 지역이 엄청난 피해를 입어, 이 지역의 포도나무를 모두 베고 대신 트러플 숲을 조성하기로 한 거죠. 그러나 생산량이 많아지니까 가격은 떨어졌고 1914년쯤 돼서는 감자 가격과 거의 같은 수준까지 떨어집니다.
그렇게 가격이 끝없이 떨어지다 보니 트러플보다 뗄감으로 쓰였던 참나무가 더 높은 가치로 주목받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트러플 숲은 대거 사라졌죠. 2차 대전 이후 수요가 늘면서 다시 가격이 폭등하긴 했지만요. 이후 미식 산업이 발달하면서 트러플이 지금의 위상을 갖게 된 거죠.
역사 속 캐비어의 가치
다음은 캐비어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캐비어도 일단 굉장히 비쌉니다. 우리가 아는 캐비어는 철갑상어의 알을 소금에 절인 걸 말하는데요. 왜 이렇게 비싼 걸까요? 철갑상어가 성체가 되기까지는 15년에서 20년이 걸립니다. 성장 속도가 이렇게 느린데 알을 매년 낳지도 않죠. 캐비어 중에 최고라는 멜루가는 7년에 한 번씩 알을 낳고, 다른 철갑상어들도 3년에 한 번씩 알을 낳습니다. 알을 얻기가 그만큼 어렵죠. 철갑상어 자체는 북반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주로 강 하구의 바닷가 쪽에 산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이건 철갑상어의 먹이인 새우나 온충이 염도가 낮은 물에서 서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식장에서 이 먹이들을 붓기는 굉장히 힘들어요. 머리가 튼튼하고 날카로워서 그물을 쉽게 찢어버리거든요.
철갑상어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귀한 생선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캐비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었죠. 추측하기로는 애초에 철갑상어를 잡기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알은 쉽게 상하다 보니 어부들만 접할 수 있었을 거고요. 이때까지만 해도 캐비어가 소량 유통되긴 했지만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캐비어는 어떻게 지금의 명성을 가지게 된 걸까요? 캐비어를 처음 상품화한 사람은 요한니스 바라바키스라는 그리스 사람입니다. 18세기 러시아 튀르크 전쟁에서 공을 세웠던 해적이었는데요. 전쟁을 끝내고 보니 완전히 알거지가 된 거죠. 이때 러시아 여황제를 찾아가서는 내가 전쟁에서 이만큼 공을 세웠는데 보상을 달라는 이야기를 해요. 이때 말과 카스피해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낚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냅니다. 바르바키스가 곧바로 카스피해로 갔는데요. 여기서 한 어부가 빵의 캐비어를 발라먹는 걸 보고 곧바로 캐비어를 상품화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캐비어 산업과 국제 거래
알이기 때문에 상할 것을 염려해서 소금을 많이 넣고 밀봉된 나무통에 담아서 팔았죠. 이땐 소금 함량이 무려 15% 정도였는데요. 지금은 냉장 유통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3.5에서 5%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캐비어가 널리 알려졌어요. 인기도 많아졌고요. 그전까지만 해도 버리는 부위였는데, 귀족의 음식이 됐죠. 18세기 후반부터는 유통 과정에 얼음을 활용하게 됐고 캐비어를 운송할 수 있는 거리도 길어집니다. 그만큼 많은 얼음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 비싸지긴 했지만, 인기는 더 높아졌죠. 짧은 유통기한과 비싼 가격. 그리고 20세기 초 미국의 해리 날보라는 사람이 병에다 캐비어를 담아 팔기 시작하면서 캐비어는 보석처럼 작은 케이스에 담겨져 팔게 됐어요. 달보이 캐비어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고급화됐죠. 이렇게 급격하게 인기가 많아지다 보니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철갑상어를 잡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지역에 따라서는 철갑상어 씨가 마른 상황에 이르렀죠. 20세기부터는 러시아 혁명과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카스피해의 철갑상어 어업은 중단됩니다. 자연스럽게 카스피해 철각상어들은 보호됐죠. 이후 캐비어의 가치를 알게 된 소련 정부에 의해서 캐비어 사업은 국가가 통제하게 됩니다. 돈이 된다고 파악했거든요. 이때부터 양식도 시작됐어요. 하지만 1989년 카스피해 어업의 위기가 닥칩니다. 카스피해는 소련과 이란이 관리를 했는데요. 소련이 붕괴하면서 카스피해 주변의 신생 독립국들이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거죠. 다들 철갑상어를 잡기 시작했고, 밀렵까지 이루어지면서 멸종 위기까지 몰리게 된 적도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국제거래와 어획을 금지하기도 했었죠. 현재는 많은 나라에서 철갑상어 양식에 힘을 쏟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노력 중입니다.
중국이나 캐나다, 미국에서도 캐비아를 생산하긴 하는데요. 전체 캐비어 생산량의 8,90%는 카스피해에서 나기 때문에 이 주변 국가들의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트러플과 캐비어 둘 다 세계적인 미식 재료로 나름 맛도 있죠. 하지만 이 두 상품은 희소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우리가 어떤 음식을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 맛보다는 희소성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